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에르메스 켈리백, 그 이름은 어떻게 태어났나

에르메스 켈리백은 원래 삭 아 데페슈였다. 그레이스 켈리의 1956년 사진에서 시작돼 1977년 공식 명칭이 된 아이코닉 백의 역사를 짚는다.

by 인그레인 에디터읽기 5업데이트 2026.07.11
에르메스 켈리백, 그 이름은 어떻게 태어났나

1956년의 어느 날, 한 여배우가 임신한 배를 가방으로 가렸다. 카메라가 셔터를 눌렀고, 그 순간 가방 하나가 이름을 얻었다. 켈리백의 시작은 화려한 런웨이가 아니라, 조용히 흘러간 일상의 한 장면이었다.

에르메스 켈리백의 원래 이름은 무엇이었을까?

켈리백은 원래 '삭 아 데페슈(Sac à Dépêches)'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.

이 가방의 뿌리는 승마 문화에 닿아 있다. 1892년, 에르메스는 기수의 부츠와 안장을 담는 큰 가죽 가방 오 아 쿠루아(Haut à courroies)를 선보였다. 그로부터 수십 년 뒤, 에밀 모리스 에르메스의 사위 로베르 뒤마는 여성을 위한, 일상에 어울리는 더 작은 버전을 만들기로 했다. 단순하면서 구조적이고, 유연하면서도 견고하며, 많은 물건을 담을 수 있도록 설계된 가방이었다. 삭 아 데페슈, 곧 '전보 가방'이라는 뜻의 이 가방은 1935년에 처음 소개됐다. 그 이름 어디에도 '켈리'는 없었다.

왜 배우의 이름이 가방에 붙었을까?

할리우드 배우이자 훗날 모나코 왕비가 된 그레이스 켈리 때문이다.

인연은 영화 촬영장에서 시작됐다. 1954년, 히치콕은 의상 디자이너 이디스 헤드가 영화 '나는 결백하다'를 위해 에르메스 액세서리를 구입하도록 허락했고, 헤드에 따르면 켈리는 그 가방과 사랑에 빠졌다. 그레이스는 이 가방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촬영이 끝난 뒤에도 계속 들고 다녔다. 배우에서 왕비로 삶이 바뀌는 동안에도, 가방은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.

그 유명한 사진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?

1956년, 그레이스 켈리가 아직 알리지 않은 임신을 가방으로 가린 장면이 세계로 퍼졌다.

1956년 모나코 왕비가 된 그는 첫 임신 중 파파라치로부터 불러오는 배를 가리기 위해 이 가방을 든 모습으로 촬영됐다. 그 사진이 전 세계 잡지 표지에 실리자, 사람들은 그때부터 이 에르메스 가방을 '켈리백'이라 부르기 시작했다. 흥미로운 점은 그 선택이 연출이 아니었다는 것이다. 그레이스 켈리는 사진을 위해 이 가방을 고른 것이 아니었다. 그것은 그의 일상 가방이었다.

공식 이름 '켈리'는 언제 붙었을까?

애칭이 먼저였고, 공식 명칭은 한참 뒤인 1977년에 결정됐다.

그 후 고객들은 에르메스로 몰려와 '그레이스 켈리의 가방'을 찾았고, 회사는 이미 일상어가 된 그 이름을 공식 채택하기까지 1977년까지 기다렸다. 이름 하나가 대중의 입에서 태어나 브랜드의 공식 언어가 되기까지, 20여 년이 걸린 셈이다. 켈리백은 680번의 손바느질과 한 명의 장인이 18시간에서 24시간에 걸쳐 완성하는 방식으로, 여러 조각의 가죽을 이어 만든다. 안장을 짓던 손끝의 기술이 여성의 가방으로 옮겨온 것이다.

켈리백의 원래 이름은 '삭 아 데페슈'였다. 한 장의 사진이 그 이름을 '켈리'로 바꿔놓았다.

자주 묻는 질문

켈리백과 버킨백은 어떻게 다른가요?

둘 다 에르메스의 대표적인 아이코닉 백이지만 태생이 다릅니다. 버킨은 1984년에 탄생한 반면, 켈리는 1935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더 오래된 디자인이에요. 켈리는 사다리꼴 실루엣과 상단 손잡이, 작은 자물쇠가 특징입니다.

그레이스 켈리가 들었던 그 가방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?

실물이 박물관에 전시된 적이 있습니다. 모나코 궁전 아카이브에서 대여한 그 핸드백은 2010년 4월 런던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에 다른 소장품과 함께 전시됐는데, 왕비가 오랫동안 아껴 든 탓에 긁힘과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.

이름은 골라 붙이는 것이 아니라, 결에서 배어 나오는 것인지도 모른다. 잘 만든 것이 세월과 사람을 거쳐 자기 이름을 얻는 이야기, 그런 아카이브를 인그레인 라이브러리에서 이어갑니다.